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송 전투 (문단 편집) == 전투 개황 == 제3사단(사단장 준장 이준식)은 7월 17일부터 동해안의 요충지인 영덕-강구 선에서 공방의 고전을 겪고 있었다. 이에, [[대한민국 육군본부]] 및 미 8군은 제22연대(연대장 중령 강태민)와 해병 1개 대대를 급파하여 그들의 예봉을 둔화하는데 주효하였으나 영덕-안동 간에 걸친 55km의 산악 및 계곡접근로는 개방된 상태를 면치 못하였다. 육군본부는 이 간극을 중시하고, 이 무렵에 영동으로부터 대구로 이동 중인 [[독립기갑연대]](연대장 대령 유흥수)를 작명 제57호(50. 7. 22부)로 제3사단인 배속하는 동시에 진보로 급파하여 이 간격을 메우는 한편, 이곳에서 공비격멸전을 수행중인 강원도 [[경찰]] 제5대대(대대장 총경 김인호)를 동 연대에 배속케 하였다. 이때, 독립기갑연대의 병력은 550명이며 1개 대대는 2개 중대로 편성되어 있었고, 주요장비는 장갑차 4대, 반 장갑차 1대, 그리고 200여의 마필이 있었는데 말은 전투에 방해가 되었던 까닭에 청송(진보 남쪽 5km)에 옮긴 뒤, 대구로 후 송하여 뒷날 기마 군사경찰대대가 사용토록 하였으며, 또한 강원도 경찰 제5대대는 병력 400여명으로써 소화기로 장비하고 있었다. 수도사단의 병력은 7,885명이며, 주요장비는 105mm 야포 4문을 비롯하여 81mm 박격포 16문, 60mm 박격포 27문이었다. 기간 중의 기상은 폭우가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때때로 개이기도 하였으며, 산악지대인 까닭에 조석으로 농무가 심하여 수색활동에 지장이 많았다. 지형은 경북 동북부의 준험한 산악지이므로 피아문에 기습작전의 효용을 높일 수가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